✍️ 박태호 파트너
딜로이트 코리아
ESG, 선언에서 시장 접근의 기준으로 — 배터리 산업의 새로운 경쟁 질서

과거 ESG는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선언적 목표이자 기업의 자율적 경영 활동으로 인식되며, 투자자와 소비자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평가 기준이자 기업의 책임경영 수준을 판단하는 지표로 활용됐다. 그러나 최근 배터리 산업을 둘러싼 환경 변화로 ESG는 단순한 기업 평가 기준을 넘어 글로벌 시장 접근성과 거래 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운영 역량이자 산업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ESG가 이처럼 변화된 배경에는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던 세계화 체제에서 공급망 안정성과 회복탄력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비용 절감과 생산 효율성이 공급망 구축의 핵심 기준이었다면, 지정학적 갈등과 공급망 교란, 핵심광물 확보 경쟁이 심화된 지금 안정적인 조달 역량, 공급망 가시성, 공급망 관리 역량이 중요한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글로벌 주요국은 규제를 통해 산업 질서를 재편하고 있으며, 배터리 산업 역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EU 배터리 규정(EU Battery Regulation)과 미국의 OBBBA(One Big Beautiful Bill Act)로 볼 수 있다. EU는 탄소발자국, 디지털 배터리 패스포트(Digital Battery Passport), 공급망 실사, 재생원료 사용 등 배터리 전 생애주기에 걸친 지속가능성 요건을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지속가능성을 제품 경쟁력의 일부로 제도화하고 있다. 특히 전기차용 배터리와 일정 규모 이상의 산업용 배터리를 대상으로 탄소발자국, 원재료, 재활용 정보 등의 공개를 요구함으로써 제품 단위의 투명성과 추적 가능성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IRA(Inflation Reduction Act)를 기반으로 공급망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OBBBA는 청정에너지 세액공제 적용 요건과 관련해 PFE(Prohibited Foreign Entity) 규정을 도입하고, 이를 SFE(Specified Foreign Entity)와 FIE(Foreign-Influenced Entity)로 구분해 공급망 참여 주체에 대한 기준을 보다 구체화했다. 또한 특정 해외 이해관계가 포함된 공급망에 대해서는 세액공제 적용을 제한함으로써 공급망 독립성과 경제안보를 강화하려는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U와 미국은 접근 방식에 차이를 보이지만, 산업 경쟁력의 기반을 규제를 통해 재정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EU가 제품 지속가능성, 순환경제, 정보 투명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 규범을 구축하고 있다면, 미국은 공급망 재편과 경제안보를 중심으로 청정에너지 산업의 시장 참여 기준을 재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ESG는 더 이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는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운영 역량이자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AI가 재정의하는 배터리의 위상 — 새로운 수요 축의 부상
공급망 패러다임 변화와 규제가 배터리 산업의 경쟁 질서를 재편하는 가운데, 수요 측면에서도 배터리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정의하는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EU가 배터리를 전략적 가치사슬(Strategic Value Chain)로 지정하고 핵심 투자·혁신 분야로 육성해 온 것은 단순히 전기차 산업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 에너지 전환과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전략적 판단에 기반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의 급속한 확산이 전력 수요 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면서 배터리의 역할 또한 에너지 인프라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일부 지역에서 조정 국면을 맞이하면서 배터리 산업 성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지만, 동시에 AI 확산과 디지털 전환은 새로운 수요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에 따라 전력망의 안정성과 유연성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면서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24년 약 415TWh에서 2030년 약 945TWh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력망 투자와 에너지 저장 솔루션의 필요성 역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AI가 물리적 산업 영역으로 확장되는 이른바 ‘피지컬 AI(Physical AI)’의 발전은 로봇, 자율이동체, 도심항공교통(UAM), 항공우주 등 다양한 산업에서 고성능 배터리 수요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배터리 산업이 기존 시장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산업의 기반 기술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배터리는 모빌리티의 핵심 부품을 넘어 AI와 재생에너지, 전력망을 연결하는 에너지 인프라의 핵심 구성요소로 그 위상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변화가 배터리 기업들의 중장기 전략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ESG 보고서에 이를 ‘밸류 시프트(Value Shift)’로 정의하고,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ESS 시장의 성장을 핵심 기회 요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피지컬 AI를 비롯해 로봇, 선박, 항공우주 등을 차세대 배터리 수요처로 명시하며, 배터리의 역할을 미래 에너지 인프라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다.
결국 배터리 산업은 특정 제품 시장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AI와 에너지 전환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 경쟁력 역시 성능과 생산능력만으로 평가되기보다 에너지 효율성, 원자재 순환 활용, 탄소배출 관리, 공급망 투명성과 회복탄력성 등 ESG 요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업 운영에 반영하는가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증명하는 시대 — 경쟁의 중심은 ‘데이터’
AI와 에너지 전환이 배터리 수요를 확대하는 동시에, 주요 시장에서는 제품의 지속가능성을 객관적인 데이터로 입증해야 하는 규제가 빠르게 강화되고 있다. EU는 탄소발자국, 공급망 추적성, 배터리 패스포트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제품이 어떤 원재료와 공급망을 거쳐 생산되었는지, 얼마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는지를 데이터로 증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EU 배터리 패스포트로, 이는 원재료 정보, 탄소발자국, 재생원료 사용 비율, 사용 및 재활용 정보 등 제품 전 생애주기 데이터를 디지털 방식으로 관리·공유하는 디지털 문서로, 2027년부터 전기차용, 산업용(2kWh 초과), 경량운송수단(LMT) 배터리에 의무 적용될 예정이다.
이 가운데 탄소발자국은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관리해야 하는 핵심 데이터 중 하나다. 탄소발자국은 원재료 조달, 제조, 유통, 사용, 폐기·재활용 등 제품의 생애주기 전반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정량화한 지표로, 동일한 성능의 제품이라도 얼마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기업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제품이 어떤 공급망을 거쳐 어떤 환경적 영향을 만들어냈는지를 데이터로 입증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단순히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있지 않다. 글로벌 공급망에는 수많은 소재·부품·물류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즉 이들로부터 규제 수준에 부합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제품 단위로 연결해 신뢰성 있게 관리해야 한다. 결국 기업에 필요한 것은 규제별로 개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 기반이다. 제품 전과정평가(LCA), 공급망 데이터 관리, 디지털 제품여권(DPP), 데이터 거버넌스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규제 변화에도 일관된 추적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 결국 ESG와 디지털 전환(DX)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경쟁력으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규제가 강화되면서 기업들은 ESG 데이터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디지털 전환에 나서고 있다. 특히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배터리연합(GBA)의 배터리 패스포트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해 시스템 연계 방식을 검증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제품별 탄소발자국 관리, 배터리 규제 대응, 공급망 실사 체계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규제 대응을 넘어, 데이터 경쟁력이 향후 글로벌 배터리 산업의 핵심 차별화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에 기반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순환경제의 부상 — 사용 후 배터리는 새로운 전략 자산
지속가능성을 데이터로 입증하는 것이 새로운 시장 접근 요건이라면,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는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산업 구조다. ESG의 범위 역시 책임 있는 광물 조달을 넘어 배터리의 생산, 사용, 회수, 재사용 및 재활용에 이르는 전 생애주기 관리로 확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사용 후 배터리는 더 이상 처리해야 할 폐기물이 아니라, 미래 공급망 안정성과 자원 확보를 뒷받침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핵심광물을 둘러싼 공급망 불확실성이 있다. 리튬, 니켈, 코발트와 같은 핵심광물은 특정 국가에 생산과 정·제련 역량이 집중되어 있으며, 신규 광산 개발에는 긴 기간과 환경·사회적 제약이 수반된다. 이에 따라 시장에 투입된 배터리에서 핵심광물을 회수·재활용하는 것은 자원 확보와 공급망 안정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중요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재활용이 확대될 경우 2050년까지 리튬과 니켈의 신규 광산 개발 필요량을 약 25%, 코발트는 약 40%까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흐름은 규제에도 반영되고 있다. EU 배터리 규정은 원료 조달부터 제조, 사용, 회수 및 재활용까지 전 생애주기에 대한 관리와 정보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품 설계 단계부터 회수와 재활용을 고려하는 순환형 가치사슬(Closed-loop Value Chain)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이러한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프랑스 데리시부르그(DBG)와 한국·유럽 기업 간 최초의 배터리 리사이클 합작법인(JV)인 ‘EV LOOP’를 설립하고, 미국에서는 도요타통상과 합작법인 ‘GMBI’를 구축하는 등 권역별 글로벌 재활용 파트너십을 확대하며 배터리 Closed-loop 체계와 순환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ESG 차원의 자원 선순환을 강화하는 동시에, 핵심 광물의 안정적 확보와 공급망 회복탄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접근으로 보인다.
공급망 회복탄력성의 시대 — 지속가능한 경쟁력의 새로운 기준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교란, 원자재 가격 변동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기업이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급망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제 기업은 단순히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는 것을 넘어, 예상치 못한 충격이 발생하더라도 빠르게 대응하고 회복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ESG는 공급망의 추적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 있는 원재료 조달과 자원순환을 강화함으로써 이러한 회복탄력성을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배터리 산업은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산업으로 보인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리튬, 니켈, 코발트의 정·제련 역량이 여전히 일부 국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정 국가가 소재부터 셀 제조까지 연결된 통합 공급망을 기반으로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공급망 다변화와 역내 생산 확대가 추진되고 있지만, 높은 생산비용과 제한된 정·제련 인프라는 여전히 중요한 제약 요인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공급망은 앞으로도 지정학적 변화와 정책 리스크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을 가능성이 높다.
소듐이온, 리튬망간리치(LMR), 전고체 배터리와 같은 차세대 기술은 핵심광물 의존도를 완화하거나 성능을 개선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 역시 새로운 소재, 생산공정, 협력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공급망 이슈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해답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보다 공급망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유연하게 설계·운영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공급망 회복탄력성은 단순한 공급처 다변화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원재료 조달부터 제조, 물류, 재활용에 이르는 가치사슬 전반의 가시성(Visibility)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규제 변화나 지정학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그 영향을 신속하게 분석해 공급망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역량도 필요하다. 결국 공급망 데이터에 대한 통합적인 관리 체계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Flexibility)이 미래 배터리 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ESG, 이제는 ‘준수’가 아닌 ‘전략’

그동안 ESG는 규제 대응이나 비용 요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공시 의무 확대, 공급망 실사, 제품 단위의 환경정보 관리 등은 기업에 새로운 부담을 요구한다. 그러나 글로벌 ESG 규제의 확대와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면서 ESG는 더 이상 선택적 활동이 아닌 사업 운영의 기본 요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ESG는 시장 접근성을 확보하고 공급망 리스크에 대응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배터리 산업은 AI 확산에 따른 에너지 인프라 수요 증가, 글로벌 ESG 규제 강화, 지정학적 변화에 따른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술 경쟁력, ESG 데이터 관리 역량, 순환경제 체계 구축, 공급망 회복탄력성은 서로 분리된 과제가 아니다.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은 이들 요소를 하나의 사업 운영 체계로 통합하고 실행할 수 있는 역량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ESG를 규제 준수가 아닌 사업 전략의 핵심 축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품 전과정평가(LCA) 기반의 탄소 데이터 관리와 배터리 패스포트 대응 체계는 글로벌 시장 접근성을 높이고, Closed-loop 기반의 자원순환은 핵심광물 공급망의 안정성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OECD 가이드라인에 기반한 공급망 실사와 통합 정보관리 체계는 공급망의 가시성과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기반이 되고 있다. ESG를 개별 규제에 대응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업 운영과 경쟁력을 연결하기 위한 전략으로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래의 ESG 경쟁력은 개별 규제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가 보다 변화하는 시장 환경과 공급망 리스크에 얼마나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업 체계를 갖추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ESG를 사후적인 규제 대응 수단이 아니라 경영 전략의 일부로 내재화한 기업만이 AI 시대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새로운 산업 질서 속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소견이며 LG에너지솔루션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