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슈퍼스테이션’으로 ‘탈석유’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다


전승민
과학저술가

원활한 친환경차 확산을 위해 수송 분야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충전 인프라의 확충이 중요한 숙제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다가오는 탈석유 및 탄소중립 시대를 예비해 기존의 인프라를 활용하는 방안도 떠오르고 있는데요. 기존 주유소·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에 태양광·연료전지 등 분산 에너지와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해 ‘전기를 직접 생산하면서 충전하는’ 시설도 최근 등장했습니다.

시대는 ‘올인원’ 주유소를 원한다

전기차가 대세로 떠오르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2030년까지 신차 판매에서 전기차 비중을 50%까지 확대하고, 유럽연합(EU)과 중국은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즉 석유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판매를 전면 금지할 계획이라고 하죠.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도 전기차 양산 계획을 줄지어 발표하고 있습니다. 폭스바겐과 미국의 빅 3 자동차 업체는 2030년까지 전기차 판매 비중을 50%로 확대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국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와 기아는 2030년에 30%, 2040년에는 80%까지 전기차 비중을 끌어올린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했는데요. 특히 현대차의 ‘제네시스’는 앞으로 모든 후속 모델을 전기차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파란 번호판 늘고 있지만, 인프라는 ‘아직’

이렇게 되면 당장 문제가 되는 곳은 다름 아닌 주유소입니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어느 날 모두 없어지지 않는 한 가솔린과 디젤, LPG 등 석유 연료 공급을 포기할 수는 없죠. 즉 지금 당장 전기차나 수소차를 위해 업종을 변환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주유소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불편은 운전자들 몫입니다. 내연기관차와 달리 전기차는 충전에 짧게는 수십 분, 길게는 몇 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전기차 충전기(공용 7만여 기, 비공용 3만여 기)의 숫자는 10만 기가 넘었다지만, 전체의 1%가 채 안 되는 전기차 운전자들은 여전히 충전시설을 찾아 헤맵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충분한 시설의 확충뿐이지만 당장 몇 퍼센트 되지 않는 친환경 차량을 위해 기존 주유소 사업주들의 투자를 요구하기도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나 이대로 둔다면 수많은 주유소가 ‘좌초 자산’이 될 것도 자명하죠.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주유소가 2019년 수준의 영업실적을 유지하려면 1만 1,000여 곳의 주유소 중 2030년까지 2,053곳이, 2040년까지는 전체 주유소의 85%인 8,529곳이 퇴출당할 거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전기차가 급증하면서 앞으로 전력이 부족해질 거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대용량 발전소를 단기간에 짓기란 쉽지 않은데, 전기차 보급 속도를 발전소 건설 속도가 따라잡을 수 있겠냐는 것이죠.

충전소에서 전기를 ‘자급자족’한다면?

이 과정에서 ‘기존의 주유소에서 모든 것을 다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아이디어가 부각되었습니다. 기존 주유소를 그대로 운영하면서, 전기차 충전시설을 추가로 설치하고, 여기에 태양광 발전 시설, 연료전지 발전 시설 등을 설치해 전력 생산 기능을 더하는 식입니다. 전기를 직접 생산할 수 있으니 대규모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고, 전력의 생산과 소비가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전력 계통망에 가해지는 부담도 줄어들게 됩니다.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의 성공, 규제 해소에 달렸다

이런 주유소가 실제로 있습니다. 국내 1호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으로 꼽히는 곳은 ‘박미 주유소’입니다.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자리한 이곳은 먼 곳에서 보기에 일반 주유소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주유소 유휴부지와 지붕을 활용해 100kW급, 350kW급 고속 충전기와 연료전지 등 태양광 발전 및 저장 시설을 갖췄습니다.

참고를 위한 이미지

이 주유소는 지난 2월 리모델링을 거쳐 새롭게 문을 열고 한 달 반 만에 연료전지를 통해서만 약 313MWh의 전력을 생산했는데요. 연간으로 환산하면 전기자동차가 약 4만 3000회 충전할 수 있는 전력(약 2500MWh)입니다. 국내에 에너지 슈퍼스테이션 숫자를 늘려나간다면 수송용 에너지 생산과 소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으며, 고속 충전 시설의 확충도 동시에 이뤄질 수 있습니다.

기존 주유소 부지 활용, 왜 안 되나

문제는 법과 제도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먼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위험물안전관리법’입니다. 연료전지 발전 시설을 ‘위험 시설’로 구분해 주유소 내에 설치할 수 없도록 한 법인데요. 박미 주유소의 경우 ‘규제 샌드박스’ 특례를 통해 설치할 수 있었지만 같은 형태의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을 추가로 설치할 경우 법 개정이 불가피합니다. 개정은 박미 주유소 운영 실적 평가를 통해 진행하게 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같은 사업자가 신재생 발전사업과 전기차 충전사업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즉 현재의 법 제도 내에선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에서 생산한 전기를 그대로 전기차 충전에 활용할 수 없죠. 이 때문에 박미 주유소도 생산한 전기를 모두 한전에 판매하고, 전기차 충전을 할 때는 새롭게 전기를 끌어와야 했습니다. 전력 계통망의 부담을 덜 수 있는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의 장점은 사라지고 도리어 부담이 커지는 구조여서 개선이 시급해 보입니다.
사업자들은 이 밖에도 발전에 따른 인센티브 제공, 충·발전 시설에 대한 건폐율 완화, 주유소 의무 확보 주차면적에 전기차 충전기 주차면적 포함 등 여러 가지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GS칼텍스는 타 산업과의 연계에 주력한 충전소를 구축 중이다. 세차와 정비는 물론 충전 대기시간을 위한 카페, 공유 오피스 등을 연계하는 등 사업 범위를 넓히고 있다.

외국, 타 산업은 어떤가?

해외의 경우 민간 기업들의 노력이 두드러집니다. 석유회사들이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전기차 충전 사업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로얄더치셸은 현재 6만 개의 충전소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5년까지 이를 50만 개까지 확장할 계획입니다. 영국계 석유회사 BP PLC도 충전 인프라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전기차 충전기 10만 개를 설치하고, 2025년까지 투자 자본의 40% 이상을 바이오 에너지와 EV 충전, 재생에너지와 수소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죠.
국내외 다양한 업종에서도 ‘모빌리티 플랫폼’ 구축의 관점에서 전력 충전 서비스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전국 지점을 소유한 대형 유통 업체들은 주차 공간과 편의시설 등의 거점을 갖고 있어, 전기차 충전/ 차량 공유/ 신차 시승 정비망 등 사업 확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분산 에너지 활성화 대책, 빛을 볼 수 있을까?

에너지 슈퍼스테이션은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면서도 발전소 및 전력계통 부담을 덜 수 있는 효과적인 운영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1호 주유소의 운영 실적을 토대로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규제 개선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는데요. 물론 안전성 확보를 위한 장치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성과가 전국으로 보급되기 시작할 때, 한국은 세계에 유례없는 독자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전기차 충전 시스템을 확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소견이며 LG에너지솔루션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