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 기업들의 ‘배터리 내재화’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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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용어는 ‘축적의 시간’입니다. 이차전지 산업에서도 국내 대표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이 오랜 기간 쌓아온 축적의 시간 덕분에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이차전지 밸류체인에 포함된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은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축적의 시간이 계속 짧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환경차 시대로의 빠른 전환과 이차전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이차전지 밸류체인에 뛰어들어서 경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해 시장에서는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의 ‘배터리 내재화’가 초미의 관심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이슈를 짚어보며 앞으로의 시장을 전망해 보고자 합니다.

무수한 루머와 함께 많은 기업들이 언급했던 애플카

지난해 1월 국내 언론을 통해 애플이 자율주행 전기차, 이른바 애플카(Apple Car)를 출시하기 위해 현대차그룹과 협상 중이라는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일부 관계자들이 ‘논의 초기단계이고 결정된 바는 없다’며 이를 부인하지 않아 협력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시장의 다양한 추측이 이어졌으나 약 한 달 뒤에 현대차그룹은 ‘애플과 협의를 하지 않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애플-현대차 협력 뉴스가 나온 이후, 시장에서는 애플카와 관련해 협력 논의 중이거나 가능성이 있는 기업으로 닛산, 폭스바겐, BMW, GM, PSA 등 다양한 자동차 제조사들이 연관되며 루머를 증폭시켰고, 폭스콘 등 非자동차사들까지 포함할 경우 애플카 제조 파트너로 선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거론된 기업만 10여 개에 달했습니다.

애플카 사태로 애플이 확인한 사실

애플이 오래 전부터 자동차업 진출을 구상해 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 있습니다. 2010년대 초반 ‘프로젝트 타이탄’으로 불리는 자율주행차 개발을 시작한 바 있으며, 이와 관련해 201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교통국(DMV)로부터 자율주행차 기술 테스트를 목적으로 도로주행 허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애플카 개발을 담당하는 부서로 알려진 특별 프로젝트 그룹, 즉 SPG(Special Project Group)에서 전기차, 배터리 관련 엔지니어를 대거 채용하기도 했습니다.

애플이 자동차를 만들 것이라는 루머는 201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나왔지만 애플이 무엇을 만들려는 지, 누구와 협력하려는 지에 대한 공식 입장은 한 번도 밝힌 적이 없는 상황이며, 이에 따라 애플카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만 높아지는 상황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닛산과의 협상 결렬도 ‘조립만 해달라’는 애플의 요구를 닛산이 거절했기 때문이며, 애플에서는 소프트웨어는 물론 하드웨어의 통제권까지 자사가 갖겠다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가치가 높고 뛰어난 재무상황을 갖추고 있으며,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역량까지 보유한 애플과 협력 시 글로벌 완성차사들은 단순한 조력자 또는 하청업체에 그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이폰 조립사인 ‘폭스콘’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가치가 핵심인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자동차 업계의 폭스콘’이 되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은 상황이다.

다수의 글로벌 완성차사들이 제조 협력관계를 맺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애플카 사태로 확인한 바, 애플이 향후 글로벌 자동차사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구도는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신생 전기차 기업과의 협력 가능성도 부각되고 있으나, 테슬라가 전기차 양산 과정에서 생산량의 급격한 확대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례를 감안하면, 양산 경험이 없거나 부족한 신생 전기차 제조사들과의 협업은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처럼 ‘애플이 2025년 자율주행 기능이 포함된 전기차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차량 개발과 양산에 긴 시간이 필요한 점을 감안할 때, 애플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며 조속히 파트너사를 찾아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애플카 사태로 자동차 기업들이 확인한 사실

표면적으로는 애플이 ‘다른 완성차 기업과도 협력 가능하지만 귀사를 협력 파트너사로 선택했음’을 강조하며 협상 주도권을 가진 것으로 보이나, 아직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불리할 것은 없는 구도입니다.

일각에서 애플의 이상적인 파트너로 전망되기도 했던 BMW의 니콜라스 피터 CFO는 ‘애플의 시장 진출에 위협을 느끼지 못하며, 산업 내 치열해지는 경쟁을 이겨내고 선도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면서 자신감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많은 기관들도 이와 유사한 분석들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테슬라의 시장 진입으로 이미 큰 충격을 받은 완성차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애플 또는 구글과 같은 또 다른 강력한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해 양산에 이르기까지 아직은 경쟁력을 확보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향후 3~4년, 자동차 기업들의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한 시간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애플의 브랜드 파워를 고려할 때,
결국은 전기차 생산 파트너를 찾게 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많은 전문가들은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 애플과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자동차 시장에 진입해 애플카, 구글카 등을 출시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기존 자동차 기업들은 강력한 브랜드 파워, 자금력, S/W 경쟁력을 앞세운 게임체인저들로부터 시장 방어가 필요하며 향후 3~4년이 이를 준비하기 위한 골든 타임이 될 것입니다. 자동차사들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완성차사들의 최우선 과제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2020년 9월 테슬라의 배터리데이에 이어 지난해 3월에는 폭스바겐이 파워데이를 개최하며 완성차사들이 ‘배터리 내재화’ 이슈를 시장에 던졌습니다. 테슬라와 폭스바겐은 이미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구축한 대표적인 완성차 기업입니다. 완성차사들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출시 현황과 계획을 비교(표1)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자동차사들이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출시하면서 전기차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점입니다.

(표1) 완성차 기업들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비교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가져올 이차전지 시장의 변화

내연기관 자동차의 플랫폼과 비교할 때, 전기차 전용 플랫폼은 배터리와 모터가 섀시에 포함되어 충격 보호가 필요하며 강도와 강성이 중요하므로 프레임바디의 도입이 불가피합니다. 프레임바디가 도입되면 동일한 플랫폼에서 다양한 차종을 생산할 수 있어 양산성이 극대화되고 규모의 경제 확보가 용이하게 됩니다. 전용 플랫폼에는 각 플랫폼별로 규격화된 배터리셀이 탑재되기 때문에 전용 플랫폼을 확보하는 완성차 기업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배터리 내재화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또다른 장점은
배터리 모듈, 팩 단위를 생략한
CTP(Cell To Pack), CTV(Cell To Vehicle)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CTP, CTV 구현을 위해서는 배터리의 안정성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고체배터리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울러 전용 플랫폼 기반 CTP, CTV가 구현되면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에도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현재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는 배터리 팩, 모듈의 해체 작업이 상당부분 생략되고 자동화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EV 전용 플랫폼

완성차 기업들에게도 ‘축적의 시간’은 필요하다

이처럼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등장으로 배터리 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며, 완성차 기업들의 배터리 내재화에 대한 유인도 커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급망 구축, 대량 생산, R&D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기업들에게 이차전지는 낯선 분야입니다. 생소한 업(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법입니다. 이차전지 산업생태계를 리드하는 기업들은 자동차 기업들에게 필요한 ‘축적의 시간’을 초격차를 위한 ‘기회의 시간’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해당 필진의 소견이며 LG에너지솔루션의 입장이나 전략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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